효도라는 것은 천성(天性)에서 우러나는 것이요、배워서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니 내가 일찍이 종종(種種) 손가락을 찢어서 주혈(注血) 했다거나 다리를 찢어서 고기를 해드렸다는 특별한 효행과 얼음 속에서 잉어가 나오고 눈 속에서 댓순이 나왔다 하여 보통 사람보다 특이한 것들이 모두 배움이 없는 이에게서 많이 나왔음을 보게 되고 군자(君子)로서 배움이 있는 이에게서는 반드시 특별한 효행과 영험이 보통과 닮은 일이 있지 않았으니 어찌 배운 군자의 효도가 평범한 이에게 따르지 못한 것이냐? 대개 군자(君子)의 효도하는 것은 살아계실 때 모시매 그 힘을 다할 뿐이요 장사와 제사에도 그 예(禮)만 다할 뿐이요 평생토록 사모할 뿐이요 몸을 닦고 끼치신 훌륭하신 명예나 생각할 뿐이기 때문인 것인데 당진(唐津)의 효자 인공(印公)같은 이는 내가 군자(君子)의 효라고 하겠다. 공(公)의 이름(諱:돌아가신 분의 이름)은 재종(載宗)이요 자(字)는 치원(稚元)이니 시조서(이름;瑞)께서 풍익대부(馮翊大夫)로서 신라로 사신을 나오시매 신라왕이 그 어짐을 공경하여 교동백(喬桐伯)을 봉(封)하고 아찬(阿餐)의 벼슬을 내리었다. 자손들이 인하여 살매 교동(喬桐)으로 본관(本貫)을 하였다. 여러 대를 내려와 빈(邠)에 이르니 호는 초당(草堂)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을 봉하였으니 시호(諡)는 문정공(文貞公)이시다. 여러 대 내려와서 원보(元寶)에 이르러서는 이태조(李太祖)를 도와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었고 함산군(咸山君)에 봉케 되었다. 대대로 벼슬이 이었다가 이조 중엽에 이르러서는 강호(江湖)로 낙향하여 덕을 숨겨 살아서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공의 증조의 이름은 정연(廷璉)이요 조부의 이름은 이수(以秀)이니 학행(學行)이 있었고 아버지의 이름은 국형(國衡)이니 온 마을이 인후장자(仁厚長者)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공주이씨 환오(焕五)의 따님으로 순조 계해 二월六일에 공을 낳으셨다. 공께서는 어려서부터 영리함이 남달랐는데 크면서부터 공부하매 글씨(楷書)를 정교하게 쓰셨고 온 고을이 칭송하였다. 여러 번 향시(鄉試)를 보았으나 뜻을 펴지 못하매 드디어 결연(決然)히 이를 포기하고 실학(實學)을 실천하고 닦아서 그 업(業)에 전심하사 선비와 벗들이 정중히 여기었다. 평소 거처하심에 노친(老親)에게 독실하게 효도하여 뜻과 몸을 잘 받들었고 혼정신성(昏定晨省)울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어버이가 병환이 계시매 웃음을 삼가고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의원을 찾고 약울 가려서 쓰매 비록 비바람 치는 때라도 먼 길을 물 건너서 반드시 몸소 다니고 약 달이는 것도 친히 하되 오래도록 더욱 태만하지 않았다. 어버이가 돌아가시매 슬픔이 극진하여 마지막 보내는 기구를 예에 쫓아 일준( 一遵)히 하매 정성과 힘을 다하여 칫수(分寸)까지 일일이 손수 기록하고 다시 보고 우셨다. 그리고 三년을 시묘(侍墓) 사시매 날마다 초상 때와 같이 하매 보는 사람이 감동치 않음이 없었으니 그 사모의 정이 평생토록 한결 같이 하였고 마을 사람을 도와주고 일가에 화목하고 자손에게 옳은 방향으로 가르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 모두가 효도로써 미루어서 하신 것이다. 철종 무오 三월 二十七일에 돌아가셔서 당진군 고대면 장항리 담산(淡山) 임좌에 장사를 모시었다. 공께서 돌아가시매 온 고을 신사들이 공의 효행을 위에 장계하여 예조(禮曹)에까지 이르렀으나 정문의 규례(規例)가 폐지되었으므로 얻지 못하매 선비들의 공론이 애석하다고 하였다. 부인은 서령유씨(瑞寧柳氏) 문빈(文彬)의 따님이시니 규범(規範)에 덕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공보다 二十三년이나 뒤에 돌아가매 같은 곳에 장사 모셨다. 아들 하나를 두니 홍석(洪錫)이요 손자는 다섯인데 학수(鶴洙)는 주사(主事)요 용수(龍洙) 노수(魯洙) 태수(台洙 : 직위 主事) 탁수(鐸洙)가 있고 증손 현손이하는 번거로워 쓰지 않는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공의 아들과 손자들이 모두 효도하고 우애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정성껏 가풍을 지키고 그 번창함이 또 이와 같으니 슬프ᅳ도다. 공의 효도하심을 가히 알겠도다. 공께서는 평생 몸을 조심하여 하루도 태만치 않았다 하니 손가락을 찢고 다리를 베여서 하늘의 영감을 받지는 않았어도 반드시 “효자는 끊어지지 않고 길이 類릍 내려간다.”는 것과 같으니 어찌 일시의 얼음 속 고기와 눈 속의 댓순에만 비할 손가? 이제 공의 묘비명을 써 줄 것을 나에게 와서 청하는 사람은 곧 공의 증손 근식(謹植) 경식(敬植) 큰집 현손(玄孫) 장환(章煥)인 바 모두가 새롭고도 훌륭한 선비들이다. 내가 감히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대략 右와 갈이 쓰고 이어서 銘하여 이르노니 “선비가 뉘라서 배우지 않았고 아들이 뉘라서 효도하지 않으리오마는 한갓 실상이 아닌 것을 이름하면 어찌 풍속교화에 붙이리오. 한 선비의 숨은 아름다움이 당진의 호숫가에 전해오네. 독실히 공경하고 공손 검소하였음은 세상에서 비웃지 않으리. 그 효성의 순수함과 그 배움의 실천함이여 실지대로 써서 분칠하지 않았으니 후세사람들은 어떻게 본받을 것인가?” 순종 경술후 계유(一九三三年) 經學院大提學 東萊 鄭萬朝 撰 崇祿大夫前判敦寧院事 海平 尹用求 書 通政大夫承宣院右副承宣 杞溪 兪鎭贊 篆